아침마다 엄마 아빠는 나를 배려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

평일의 엄마는 일기를 쓴다,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오늘은 주말인데 엄마 아빠는 산에 가신다며 나가셨다.

 

혼자 있는 동안 실컷 울어나 보려고 슬픈 영화들 리스트를 찾아보았다.

내가 이런 거나 찾는 사람이 되다니.

 

네이버나 구글에 ' 슬픈 영화 추천'이나 '이별 극복법' 같은 한심한 질문을 던지는 건

내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별 소득은 없고 상투적인 눈물 빼기 영화나 추천해주길래

넷플릭스와 왓챠에서 스치듯이 본 이터널 선샤인을 틀었다.

 

학교 다닐 때 신처럼 여겨지던 미셸 공드리의 작품이지만..

왠지 우울하고 난해해 보여 틀었다가 끄기를 여러 번 했던 영화였다.

'보고 싶어요' 같은 목록에 늘 들어갔지만 절대 누르지 않는 몇 개의 영화 중 하나였다.

 

 

지금이 기회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텅 빈 지금 같은 때 냉큼 틀어버리기 좋을 것 같다.

 

 

 

 

 

 

긴 영화가 끝났을 때

집에 아무도 없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러닝타임 내내 펑펑 울었다는 누군가의 감상평과는 달리

나는 영화 거의 끝까지는 괜찮았는데.

 

내게 아직도 이렇게 머리가 아프도록 엉엉 울 눈물이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물에 빠진 것 마냥 머리가 울리도록 수건을 틀어막고 울었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들은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생각했다.

너를 만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어땠을까?

너를 다시 만나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너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안다.

 

너를 다시 만나도, 바보 같은 나는

부족하지만 그런 그대로의 너를 사랑했기에 다시 만나도 널 사랑할 것을 안다.

 

다시 만나도 상처받고 같은 결과를 맞이하겠지만,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느낌은 절대 뿌리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추억과 기억들은 나를 병들게 해도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들을 사랑했다.

아픔이 군데군데 얼룩져있어도 절대 버릴 수 없는 류의 것이었다.

다시 틀지 못해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게 되는 아끼던 LP판처럼.

 

그 시간이 네가 함께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 예쁜 순간을 통째 담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그 시절의 내 인생 자체라서 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차마 너를 지울 수도 없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

며칠 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거 알아? 신데렐라의 요정 대모가 신데렐라 옷이랑 구두가 다 찢겼을 때 나타났잖아

 

신데렐라라서, 신데렐라가 착해서 요정이 나타난 게 아니라
요정 대모는 절망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는 거라는 말이 있더라

 

요정이 지금의 내 앞엔 언제든 나타날 것 같아서.

오면 무슨 소원을 빌까 생각해봤는데

난 오빠 만나기 전으로 돌려달란 소원은 싫더라

 

대신 오빠가 날 잊어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고 싶었어

 

내가 오빠를 사랑한 기억은 아파도 그대로 갖고 여기까지만…

좋았던 추억 사진 물건 다 남아도 되는데 오빠만 날 놔주면-

 

오빠가 나와의 기억을 다 잊어도 좋으니그저 지금 날 자유롭게 해 줬으면 좋겠어.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때문에 작은 먼지만큼도 후회는 없다.

 

 

 

다시 태어나면 너와 결혼할 것이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번 생만큼은.. 나는 내 삶을 너에게 던졌다.

 

너에게 나를 걸어보자 생각하여 지금까지 왔다.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너와 함께 나름 아름답게 보냈으니 

남은 시간은 내가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놓아달라고.

 

 

 

이터널 선샤인에서 보여주었듯, 

나는 기억을 모두 지우고 나서도 널 만나면 다시 사랑할 것을 안다.

 

반짝이는 눈, 나를 향한 갈망.

네가 보여준 거대한 세계는 아름다웠고, 내가 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너라는 렌즈를 씌워 함께 보는 세상이 180도 달라 보이는 마법을 부렸다.

그런 달콤함에 젖어 내가 그동안 지어둔 마음의 집까지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 기억을 생각하면 난 언제고 마구 울음을 터트리게 될 만큼 나를 붙잡은 강력한 마법이자 저주였다.

 

사랑하고 행복하고 상처받고 좌절하는

짧지 않았던 여러 번의 순환을 거치면서 이제는 안녕을 고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다시는 너와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한다고.

 

 

가슴을 울리게 공감했던 평을 끝으로 마친다.

무차별한 권태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결국 남는 것은 사랑했던 이유가 아니라 사랑했던 시간들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 모든 기억마저 사라진 뒤에도 사랑했던 흔적과 습관은 남아 우리의 등을 다시금 떠민다고 말한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그곳이 진창이든 꽃밭이든, 그래, 좋다. 다시 또 한 번.

- '이터널 선샤인' 아픈 기억 지운다고 사랑이 잊혀질까, 이동진

Posted by 진배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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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산하고 3일째이다.

날짜는 늘 가물가물한데

유산은 화요일이었으니, 오늘은 금요일이니 아무튼.

첫날엔 몸이 가벼웠는데 아마도- 수액이니 뭐니 잔뜩 몸에 꽂아대고 집어넣어서

괜찮았던건가보다.

 

어제부터 몸이 그렇게 물 먹은 솜처럼 무겁더니

오늘은 푹 자고 일어났는데도 그렇게 피로하다. 1분정도 서있는 것도 힘들어서

의자와 스툴을 찾았다.

 

그래서 침대에 걸핏하면 누워서 멍하니 있는데

침대에 누우면 그렇게 별 생각이 많이 난다.

 

어머님과, 남편과.. 코리와..

 

 

방금은 그런 생각이 났다.

 

서운했던 것 중 하나인데,

결혼할 때 우리는 남편에게 양복과 구두를 해주었는데

남편은 내가 빌리는 웨딩드레스도,

친구가 직접 만들어준 웨딩드레스도 어느 것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의 남편 변명은...

'내가 직접 가서 고른것도 아닌데 뭐'

혹은

'내가 주문해서 만든 드레스도 아닌데 내가 사줘야해?' 였다.

 

 

너무 너무 서운했지만 나는 애써..

그냥 참았다. 그래. 자기가 주는건 본인이 골라서 주고싶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시부모님이 주시는 가방... 그래, 가방을 받으니까 그 것 대신으로 생각해야지...

 

 

 

그런데 이상하다.

서로가 생일 선물로라도 서로에게 사랑의 증표와 마음으로

선물을 주는 것 아닌가?

 

 

문득 모파상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떠올랐다.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 장식을 산 남편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계줄을 산 아내

 

그 남편의 시부모가 대신 목걸이를 사주었었다고 한들 그것이 남편의 마음이라고 보기에는-

크리스마스에 마음을 전했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 처럼.

 

내가 서운하고 이상한 감정이 드는 것은 절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받았기 때문에 나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부부로서의 그림은 모파상의 크리스마스 선물의 부부같은 것이었다.

부족하고 가난해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나의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름다운 머리와 오랫동안 간직한 소중한 물건을 희생해도 기쁘게 무언가 줄 수 있는 관계를 늘 바라왔다.

 

 

애써 참아왔던 것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득해야하나 수많은 고민을 했었는데

이제 그만 벗어날 때가 된 것이지.

 

 

나를 이해해주는 세계로 가고말테다.

Posted by 진배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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